Thursday, November 5, 2009

최양업 신부 7번째 서간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드디어 그렇게도 오랫동안 소망하던 때가 왔습니다. 저의 가련한 조국에서 그다지도 보고 싶었던 저의 형제들에 대해 사랑하올 신부님들께 서한을 드릴 수 있는 때가 마침내 왔습니다.
...

저는 험악한 길을 계속하여 개척해 나가면서 조선의 철통같이 굳게 닫힌 관문을 뚫고 통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관문 경비 초소의 경계망을 들키지 않게 피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모든 기대와 희망을 하느님의 자비하신 전능에 의탁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고 체포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밤중에 관문 경비 초소에 다가갔습니다. 압록강 강변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성벽 위와 읍내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경비하고 있는 것이 일상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고, 게다가 광풍이 참으로 거세게 불었으며,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경비병들이 집안에 꼼짝 않고 갇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관문 한복판을 지나왔는데도 아무도 우리를 눈치채거나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험을 모면하고 나서는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서울까지 도착했습니다.

서울에서 하루를 묵고 나서, 그때 충청도에 머물고 계시던 (페레올) 주교님을 뵈러 길을 계속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중병을 앓고 계시는 다블뤼 신부님께 가서 종부 성사를 집전해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주교님께로 가서 보니 주교님도 열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저는 하루 동안 주교님과 담화를 나눈 후,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전라도에서부터 공소 순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저는 6개월 동안 5개의 도를 무사히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두 군데에서만 약간의 위험을 겼었습니다.

한 곳에서는 어떤 작은 마을에 여교우 3명만이 있었는데, 외교인인 부모들과 남편들과 함께 역시 외교인들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방문하려고 미사 가방을 챙겨 가지고 복사를 데리고 저녁 무렵에 아주 초라한 집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제가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양 사람인 줄로 의심하여 즉시 마을 이장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마을 이장이 그날 밤 안에 저를 잡아죽일 의논을 하자고 그 마을의 모든 연장자들을 소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온 마을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우리가 도망을 친다면, 우리에게 대해서뿐 아니라 우리가 들었던 집에 대해서도 마을 사람들의 성을 돋우어 광분하게 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외교인들의 고함소리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체하면서 밤새도록 저들이 쳐들어오기만 대비하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우리가 아침에 그 마을을 떠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 세 여교우들을 보러 갈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의기소침한 그들을 외로움 속에 버려두고 떠나 왔습니다.

또 한 곳은 거의 2백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공소 사목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마을 이장에게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그 이장은 자기 마을에 서양 사람이 와 있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떠벌리면서 마침 바로 그 시각에 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는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욕설과 저주와 협박과 공갈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제가 아주 고약한 서양놈이요, 프랑스놈이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너는 큰 도둑놈이다. 너는 우리한테서 도둑질을 하려고 프랑스에서 온 놈인지? 너희 서양놈들은 사기꾼들이요 프랑스놈들은 선동꾼들이다. 우리를 이렇게 소란스럽게 하고 속이는 것이 너희에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 네가 어디 견딜 수 있나 보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등등. 이렇게 그들은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마침내는 제풀에 지쳐서 잠을 자러 갔습니다.

저는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일어나서 날이 새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전날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준비를 한 이들이 미사를 간절히 기대하였는데도 저는 미사도 못 드리고 도망쳤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날 저를 뒤쫓아 백 리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 마을에서 나올 수 없었던 그 밖의 신자들은 실망과 한숨 속에 그냥 내버려졌습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처럼 고난에 찬 예를 한두 가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떤 양반 집 출신의 처녀가 열 다섯 살 때에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처녀는 천주교를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자기 아버지 집에서는 종교를 실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집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녀는 교우들을 찾으러 가던 도중에 길에서 어떤 외교인 남자에게 납치를 당하여 억지로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 납치자의 집에서 12년 동안 살았으나, 자기 부모한테도 어느 교우한테도 아무런 소식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다시 도망할 궁리를 하고 있었으나, 어디로 도망가야 피신처를 찾아낼지 몰랐고, 또 혹시 도망치다가 다른 납치자의 손에 떨어질 위험도 있었습니다. 우 연히 교우 하나가 어떤 외교인 친구로부터 이 여인에 관하여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친척으로 가장하여 그 여자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위해 주고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배우라고 책 몇 권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성사를 받게 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저는 또 양반 집안 출신인 안나라는 여교우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19년 동안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만 갇혀 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사를 받지 못한 채로 지냈습니다. 바로 올해에 그 여인은 친척 되는 어떤 신자에게 소식을 전할 수가 있어서, 이 신자가 안나를 찾아가서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안나가 사는 집에서 50리 떨어진 공소집에 있었습니다. 그 신자가 저를 찾아와서 안나가 얼마나 열심하고, 또 얼마나 간절하게 저를 기다리며, 또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서 얼마나 처량한 처지에 있는지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온갖 미신을 숭상하는 곳에서, 혼자서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신자의 본분을 조금도 궐한 적이 없었답니다. 잠시도 끊임없이 줄곧 성사 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자기에게 사제 한 사람을 보내 주시기를 하느님께 줄기차게 애원하며 기도하였답니다.

안나는 외로움을 스스로 달래느라고 가끔 유럽에서 생산한 포목의 자그마한 천 조각을 집어들고 들여다보면서 유럽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생각하곤 하였답니다. “그 물건이 유럽에서 운반되어 온 것이니만큼 머지않아 선교사 신부님들도 유럽에서 다시 올 것인 즉, 언젠가는 신부님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위로했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그냥 참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충실한 여교우에게 가까이 가서 그에게 성사를 전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저는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안나의 진심을 신뢰하였습니다. 지극히 착하신 하느님과 동정 마리아께서 마침내 그토록 간절한 안나의 애원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처럼 충실한 당신의 여종에게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집전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제게 알려주시리라고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인 성체를 모시고 저에게 안나의 얘기를 들려준 그 신자를 데리고 허둥지둥 서둘러 황급히 안나가 사는 마을로 달려갔습니다.그 마을 전체가 외교인들이었고, 그 집안 식구들도 모두 외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즉 고해소를 꾸밀 곳도 마땅치 않았고, 성체를 안치할 찬먹을 설치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저는 마치 길가다가 피곤하여 노독을 풀고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잠깐 쉬는 것처럼 강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한편 제가 그 여인을 상면할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저와 동행하여 온 그 신자를 정탐으로 보냈습니다. 그 신자가 안나의 집에 들어가 보니 그 집 남자들은 모두 밭에 나가서 집 안에는 어른이 아무도 없고 안나만이 홀로 자기 딸과 어린아이 몇 명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신자는 그 열심한 여교우가 성찰한 것을 적은 쪽지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저는 앉은자리에서 그것을 읽고 즉시 안나의 집으로 들어가, 안나를 바깥 사랑방으로 불러내 재빨리 사죄경을 염해 주고 성체를 영해 준 다음 곧바로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리면서 빠져 나왔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를 실천할 자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방에 궁핍 투성이요 사방에 투쟁뿐입니다. 우리는 마치 지극히 큰 죄나 저지르는 듯이 항상 전전긍긍 떨고 있으며, 사람들은 공연히 우리를 미워하고 마치 우리를 흉악범들처럼 멸시합니다.

만일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즉시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그를 공격하고, 그를 인간 중에서 가장 부도덕한 자로 여겨 저주를 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괴롭힙니다. 결국은 그를 멀리 쫓아내고 다시는 자기 동족들 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양반들은 그들 중에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을 더욱 격렬하게 핍박합니다. 가족 중의 어떤 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의 가문 전체가 불명예로 낙인이 찍히고, 그 집안의 모든 영광과 모든 희망이 걸려 있는 양반의 칭호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많은 신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크나큰 악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회가 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치욕 속에서 그들의 영광을 찾기보다는 그들의 헛된 칭호를 누리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떤 품계에 오르게 되면 악표의 바위가 더욱 단단해집니다. 어 떤 신입 교우가 최근에 친구들의 영향력으로 5품 관직에 올랐는데, 그로서는 이 승진을 위해 손을 쓴 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본인은 아무런 공로도 없고 한 번도 청하지 않았는데, 순전히 친척이나 친지들의 영향력만으로 관직을 얻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직이 어떤 경로로 내려졌든지 간에, 반드시 수락해야 합니다. 만일 (임금님이 내린 관직을) 사양했다가는 철저하게 망신을 당하거나 죽음까지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신입 교우는 신앙을 잃어버릴 크나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사람은 어떤 도나 큰 도시의 관장으로 발령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관장의 직책을 받아들이면, 미신적인 의식에 자주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직분을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만일 그 관직을 수락하지 아니하면 반역자로 몰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신은 죽을 위험에서 처하게 되고 그의 온 가족은 극도록 큰 환난에 휘말릴 위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반 집의 부녀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합니다. 여자들은 자기 집 문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아주 가까운 자기 친척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마주 보아서는 안됩니다.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이게 되면 큰 죄악으로 돌립니다.

과부가 되면 비록 혼인한 지 단 하루만에 남편을 잃었다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든 말든 상관없이 반드시 수절을 해야 합니다. 만일 재혼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의 불명예로 말미암아 온 가문도 망신도 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항상 밤에 성사를 받으러 옵니다. 이렇게 여자들이 밤길을 다니는 모험을 하는 주에 얼마나 많은 비극을 당할 위험이 있는지 모릅니다. 한 번은 두 여인이 공소 순회라는 사제한테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들은 길을 잘 모르는데 마침 공교롭게도 그날 밤은 칠흑 같이 캄캄한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들이 집을 떠난 지 조금 후에 그만 길을 잃어버려 밤새도록 길 아닌 험한 곳을 헤맸습니다. 이렇게 암흑 속에서 방황하는 동안에 폭포 같은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몸이 흠뻑 젖어 춥고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두 여인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언 몸을 서로 꼭 껴안음으로써 체온을 간신히 유지하였습니다

그 두 여인은 새벽녘이 되자 간신히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 집에서 불과 10리밖에 안돼는 곳에서 이런 고생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라도 성사를 받을 수 있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으로 여깁니다.

외교인 부모나 남편의 슬하에 매여 있는 여교우들은 대개가 성사를 받으러 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사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애만 태웁니다. 어느 때가 되어야 저렇게도 천상 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배불리 포식시킬 수 있겠습니까?

단 한번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큰 은총입니다. 더 자주 그러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틀이나 사흘의 길을 걷는 것쯤은 오히려 가깝게 여깁니다. 우리는 신자들이 사제를 보기 위해서나 미사 성제에 참여하기 위해 떼를 지어 한꺼번에 급히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매우 엄격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명령을 위반하는 신자들에게 아무리 벌을 내려도 신자들은 이 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막무가내로 순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모두 새 옷을 갈아입고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리고 사제가 그들의 인사를 받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그들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들은 공소 회장들을 연방 들여보내 어서 인사를 올리고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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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지 아니하는) 동정 생활을 불효로 매도합니다. 모든 이가 정결을 지키는 삶을 순전히 기만하는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야유합니다. 신자들을 반역도당으로 여겨 누구든지 마음대로 핍박할 수 있고, 가장 천한 백성까지도 천주교 신자를 마구 박해합니다.

신심 깊은 열심한 여인이라도 결혼하지 아니하고 남편이 없으면 외교인들에게 납치되어 갈 위험이 있고, 따라서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 생활을 찬양하는 설교자인 우리 사제들이 오히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권유하거나 강제로 명령하는 자가 되어야 할 지경입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을 더 잘 설명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바르바라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오빠가 8명이 있는 막내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오빠는 다 죽고 오빠 둘만 남았습니다. 바르바라는 7세에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루는 올케가 옷 한 벌을 지으면서 바르바라에게 말했습니다. “이 옷은 아가씨 옷입니다. 아가씨 혼인날에 입으실 거예요” 이 말을 들은 바르바라는 즉시 집안의 가장 으슥한 곳으로 피해 가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달래면서 앞으로 너를 절대로 시집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바르바라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열한 살 되던 해 어느 날 자기 방벽에 글 몇 줄을 써놓고 나서 책 2권과 얼마의 쌀을 싸가지고 몰래 빠져나가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녀 한 명과 함께 밤중에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습니다. 아침이 되어 부모들이 깨어나 보니 바르바라가 보이지 않자 찾던 중에 벽에 바르바라가 직접 손으로 써 붙인 쪽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올 부모님, 저를 당신들의 자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동정 성모 마리아의 딸로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짧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허망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자를 영원히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저를 찾지 마십시오. 제가 어디 숨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집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사흘만에 어느 굴속에서 바르바라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은 거의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만큼 험준한 곳이요, 사나운 짐승들이나 출몰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겨우 열 살 지난 어린 바르바라는 그 굴속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며, 자기 동무를 가르치기도 하고 끝까지 마음이 변하지 말자고 권면하기도 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굴에서 나와 풀뿌리를 캐어 식량 대신으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그 황량한 곳에서 더할 수 없는 만족한 즐거움을 한껏 맛보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행복이 뜻밖에 오빠가 나타남으로 해서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오빠가 오는 것을 보고 호랑이를 본 것보다 더 무서워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자기가 갈망하는 낙원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오빠는 동생을 타이르고 달래고 엄포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작은 몸뚱아리의 온 힘을 기울여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빠의 힘에 져서 억지로 아버지의 집으로 끌려 갔습니다.

집으로 끌려오니 어머니가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한단 말이냐? 너는 마귀한테 놀림을 당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너 같은 어린애가 호랑이도 무섭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겁이 안 난단 말이냐?” 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니까 바르바라는 “어머니, 걱정마셔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셔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부터 바르바라는 규칙적으로 1주일에 두 번씩 금식재를 지키고, 고기와 생선이나 그와 같은 것들은 전혀 입데 대지도 않았습니다. 사순절 동안에는 날마다 하루에 한끼만 약간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기도하는 정신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집안일을 할 때나 들일을 할 때나 항상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는 일상 기도문이 짧지 아니한데, 바르바라는 그것을 모두 암송하였습니다. 또한 교리문답책과 신자 교리책, 그리고 성녀 바르바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성인전 및 조선의 여러 순교자들의 행적, 그 밖에도 조선 사람들이 고상하고 신심 깊게 언문으로 쓴 다른 작은 신심서들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바르바라가 성을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고 더워 죽겠다. 아이고 추워 죽겠다. 웬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부나, 웬 비가 이다지도 쏟아지나!” 하는 소리나 이와 비슷한 다른 말은 매우 자연스러운 감탄사지만, 이런 말이 바르바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모로서는 바르바라에게 종교 일이거나 세속 일이거나 무엇을 시키려면 부모가 명령하거나 권고하거나 지시할 필요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고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큼 모든 일을 다 잘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바르바라의 과도한 열성과 지나친 육체 노동을 억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면 바르바라는 “시간은 짧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활동해야 합니다. 이 육체는 머지않아 구더기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육신을 아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일해야 합니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도 신심 수업이나 고신 극기를 조금도 변함없이 실천해 나갔습니다. 사흘거리로 학질을 앓을 때에도 결코 자리에 누워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그렇게 육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어머니가 꾸중을 하면, 바르바라는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하느님께 의탁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르바라가 그렇게 늘 고신 극기하고 힘든 일로 몸을 학대하면서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가 있는지 모든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르바라는 자기 동료들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바르바라는 열네 살 되었을 때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고해 사제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고해 사제께 동정을 지키려는 결심을 말씀드렸습니다. 고해 사제는 그러한 신분에 따르는 위험을 설명해 주면서 그러한 계획을 만류하며 결심을 바꾸어 결혼을 하라고 명령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해에 바르바라는 다시 같은 고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생각에 변함이 없고 자기 뜻을 계속 지키겠다고 그 신부님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동정의 위태로움을 다시 설명하고 동정을 지킬 결심을 바꾸어야 될 필요성의 이유들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사를 받고 싶으면 동정을 지킬 결심을 바꾸고, 그러하지 아니하면 성사를 받지 말아라.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신부님이 내세운 조건을 충실히 지키지 못하고 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해 사제가 제시한 선택을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야 자기가 잘못 알아들은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슬피 통곡하였는데 아무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떤 외교인한테서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이 외교인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썼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하는 수 없이 폭력을 써서 바르바라를 강제로 납치해 가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바르바라의 부모와 오빠들은 엉뚱하게도 갖은 비방과 행패로 수모를 당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부모와 오빠들은 바르바라의 결심을 꺾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네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제발 이웃 신자 청년과 결혼하기를 동의하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헛수고였습니다. 바르바라의 결심은 한결같이 확고부동하고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히려 바르바라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저렇게도 겁이 많음을 비난하였습니다. “만일 오빠들이 저 외교인들의 핍박에서 저의 몸을 보호해 주실 수 없거나 보호해 줄 마음이 없다면 저를 혼자 내버려두세요. 저 혼자 어디든지 갈테니까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외교인들이 납치하려고 쳐들어오자 바르바라는 산 속으로 달아나 수풀 속에 숨었습니다. 납치하러 온 자들은 바르바라를 찾아내지 못하자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분풀이로 행패를 톡톡히 부리고 갔습니다.

욕설과 행패를 견디다 못한 한 오빠가 바르바라를 찾으로 나섰습니다. 그 오빠는 밤새껏 큰소리로 바르바라를 불렀습니다. 바르바라는 오빠의 목소리인 줄을 잘 알았지만, 오빠가 배반할까봐 못 미더워서 숨은 데서 감히 응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오빠가 다시 바르바라를 부르면서 찾아 나섰습니다. 바르바라가 숨은 곳에서 나와서 오빠를 위로했습니다. 바르바라가 혹시 호랑이한테 잡혀 먹히지나 않았을까 하여 밤새도록 걱정하였던 오빠는 바르바라가 눈앞에 나타나자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슬에 흠뻑 젖은 바르바라가 오빠의 인도로 근심에 잠겨 있는 어머니 앞에 왔습니다. 바르바라는 밝은 낯으로 명랑하게 “어머니 왜 근심하십니까?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서 보호하시어 모든 것이 다 잘되어 나갈거예요. 저는 아무 탈없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르바라는 그런 후에도 더 산 속으로 도망가서 위험을 모면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바르바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부모와 오빠들과 함께 다른 고장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핍박을 당한 후 바르바라는 훨씬 더 무서운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그의 항구한 결심은 더욱 굳어질 뿐이었습니다.

세 차례나 고해소에 들어갔다가 성사를 거절당하고, 네 번째 고해소에 들어갔으나 또 그냥 쫓겨 나왔습니다. 주교님께서 바르바라를 여러 차례나 부르셨습니다. 타이르기도 하시고 권고도 하시며 위협도 하셨으나 바르바라가 듣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바르바라와 그의 부모들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성사 금지의 처벌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날이 더욱 열렬하고 더욱 철저하여져서 어떤 때는 자기의 가혹한 시련이 야속하여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고, 자기의 가련한 신세가 서글퍼 흐느껴 울기도 하면서 날마다 고신 극기를 배가하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혼자서 집을 나가 호랑이를 만날 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호젓한 개울가로 가서 기도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저는 저의 관할 구역 교우촌을 순회하다가 바르바라가 사는 마을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복사인 레오의 집에서 잠시 동안 쉰 다음 기운을 차려 다시 공소 순회를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한 마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 기쁨에 넘쳐 저를 보려고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그리고서는 저에게 시중을 들기 위해 레오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저를 본 후에는 성사를 받을 방법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은 제 관할 구역 밖이었고, 따라서 저는 그 여자에게 대한 관할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다 그 가엾은 처녀는 주교님이 내리신 성사 금지 처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설명을 들은) 바르바라는 한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바르바라는 자기의 양심을 성찰하여 (자기가 범한 죄를 적은) 쪽지를 동무들에게 보여주면서 “대관절 이 죄들을 어떻게 하면 용서받게 될까?” 하고 한탄하였습니다. 또 병들어 앓고 있는 한 친구에게는 “나도 너처럼 병들어 앓기나 했으면 신부님이 나에게도 성사를 주시련만!”이라고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바르바라는 기도와 울음으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날이 새자 바르바라는 갑자기 끙끙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날에는 죽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힘든 일을 하던 그녀가 오늘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자리에 눕게 된 것이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이니 만큼) 저는 이날 바르바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다음날에는 성체를 받아 모시게 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심한 고통 중에서도 쉴 새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르바라의 죽음이 임박한 줄로 여기고 종부성사를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아직은 그리 서두를 것 없다고 대답하며 자기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루가 지난 다음 저는 복사를 바르바라에게 보내어 종부성사를 받아야 할런지 살펴보고 또 권유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바르바라는 다시 미루었습니다.

그 날 밤에 바르바라는 곁에 둘러 있는 사람들에게 신부님을 모셔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은 급박하지 않고 임종이 가까워 오지 않았으며 틀립없이 이틑날까지 죽지 않고 견딜 것이니, 아직은 신부님을 모셔올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르바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군요. 이렇게 캄캄한 밤중에 그 험한 길을 걸어오시도록 하는 것은 신부님께 번거롭게 구는 짓임을 저도 잘 압니다. 신부님께 그다지도 큰 불편을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렇지만 신부님을 꼭 뵈어야 할 급한 일이 있으니 귀찮게 여기지 마시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신부님을 모셔다 주셔요”

저는 곧 바르바라에게로 가서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집전해 주고 또 병자를 위한 성모 청원 미사를 드렸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바르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몸을 깨끗이 씻겨 주고, 명절 때의 새 옷으로 갈아 입혀서, 공소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청했습니다. 바르바라는 놀랍게도 무릎을 꿇고 노자 성체를 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르바라는 그날도 하루 종일 몹시 앓고 있었으나 정신은 조금도 흐리지 않았습니다. 바르바라는 자기가 죽음을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맑은 정신을 보존하게 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하였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어 평소보다 훨씬 더 밝은 정신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앉아 있을 때나 음식을 먹을 때나 항상 기도 중에 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지금 이 시각에도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특별히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아직도 충분히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 외에는 다른 고통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건강이 회복되면 맨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바르바라는 “저는 이 병든 육체를 떨어버리고 하늘에 계신 천상 아버지께로 가서 제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원이 없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바르바라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네 영혼의 안식을 위해 내가 미사를 드려 줄 터이니, 그 대신 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동정 성모님 앞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 라고 말했습니다. 바르바라는 더할 수 없이 평온하고 맑은 얼굴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바르바라가 마지막 숨을 거둘 즈음에 의원들이 여러 가지 침을 놓고 뜸을 뜨려고 하니까, 바르바라는 “저는 지금 숨을 거둘 참인데 이런 치료가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를 생각하고 이런 치료를 참아 받으라고 타일렀습니다. 바르바라는 그 말을 받아서 이 고통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참아 받겠다고 복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고상에만 눈을 고정시켜 똑바로 쳐다보면서 의원들이 하는 대로 내맡겼습니다. 바르바라는 전에는 침과 뜸을 맞아 본 적이 없었지만, 온 몸을 마구 찌르는 침과 뜸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견디어 냈습니다.

바르바라는 여러 가지 구원에 유익한 말로 비애에 젖어 있는 자기 부모를 위로하고 삼종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서는 문 가까이 가서 잠시 동안 문지방에 팔을 짚고 있다가 몸이 땅바닥에 푹 쓰러지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1850년 9월 23일 저녁 6시쯤이었습니다. 바르바라의 나이는 겨우 18세였습니다.


바르바라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의 아름다운 모습과 열절한 신심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르바라는 앓기 시작한 지 나흘만에 죽었습니다. 바르바라가 죽은 지 열흘이 지났으나 아직도 우리의 얼굴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이제가지도 그녀를 애도하는 말들이 우리 입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바르바라의 죽음에서 느낀 것만큼 회한과 가책과 하느님 사랑의 감정을 충격적으로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사악이 그녀의 지력을 손상할까봐, 또 위선이 그녀의 총명을 흐리게 할까봐 바삐 하늘로 거둠을 받았으니, 그녀의 생애는 짧은 시간에 쇠진하였으나 많은 시간을 채웠도다” (성경구절) [(이 세상에 오래 살 수록 그녀의 착함이 손상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의 성스러움에 대해서 교만해질 수 있기 전에 얼른 천당으로 데려가게 했다는 말)]

바르바라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이에게 귀염을 받았고, 가는 곳마다 모든 이에게 신심과 천주교 교리의 물을 들였습니다. 이처럼 순결한 영혼들의 그토록 거룩한 원의와 숭고한 결심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성사를 금지하면서까지 동정 생활을 막아야 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심정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이겠습니까!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

제가 순방한 교우 수는 3,815명인데, 그 중에서 2,401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였고, 1,764명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어른 영세자가 181명이고, 아기 영세자가 94명이며, 대세를 받은 916명에게 세례성사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예비자로 278명을 등록시켰고, 죽어 가는 외교인 아기 455명에게 임종 대세를 집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평야 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외교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 생활도 열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 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 속에서도 오래 살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되어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를 믿으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극도의 비참이 즉각적으로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입교를 망설이고 있습니다. 특 히 여인들은 신앙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지만, 입교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자기 집에서 가족과 같이 지내면 신자의 본분을 다 실천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자기 집을 떠나게 되면 자기 몸을 의지할 곳을 마련할 수가 도무지 없고, 정처 없이 떠돌아나니다가는 외교인들에게 납치 당할 큰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1839년 박해와 흉년이 들었을 때, 젊은 여인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낯선 타향에 몸을 피하고서는 빌어먹으며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외교인들의 첩이나 종이 되고만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 이 불쌍한 여인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릅니다. 1839 년의 그 가혹한 박해가 있은 후 우리 종교를 가장 미워하는 어떤 원수가 신자들을 모함하는 전혀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거짓말로 글을 잔뜩 써서 조정에 냈습니다. 조정에서는 신자들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선동하고, 특히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이 글을 조정의 이름으로 발행하여 조선 적국 각 지방에 배포했습니다.


그러나 박해자들이 무서워서 그런 거짓말투성이의 중상을 감히 반박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처럼 파렴치한 모함을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어떤 모순점을 조금이라도 폭로하면 즉시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탐색을 당하고, 신자들은 보람없이 역적으로 몰려 학살을 당할 것입니다.

프랑스 군함이 고군산도에서 파선했을 때, 그 다음 해에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단단히 다짐하였으나, 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을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는 한낱 허풍쟁이들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조선 조정은 수많은 당파로 분열되어 서로 헐뜯는 싸움으로 지새어 나날이 쇠약해짐으로써 전례 없이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전 임금(헌종)은 무절제한 과음과 방종한 여색으로 23세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고, 왕족 출신의 18세 된 새 임금(철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새 임금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사람입니다.


새 임금의 조모(송마리아)와 증조모(신마리아)는 신자로서 신앙 때문에 살해되었습니다. 새 임금의 부친(은언군 이인)은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천주교 때문에 학살당하였고, 그의 형(상계군 이담)은 모함을 당하여 역적으로 몰려 살해되었습니다.


항 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으면, 실제로 조선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이는 죽은 임금의 조모이고, 그 조모에 의하여 왕위에 올려진 현재의 임금은 아무 권한이나 권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왕국의 대신들 상호간에 끊임없이 찢어 할퀴는 당파싸움의 적개심 때문에 왕위를 잃고 목숨마저 잃게 될 큰 위험에 처해 있는데, 대신들의 불화는 임금의 권위로도 절대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대신이라는 사람들은 질투심으로 서로서로 함정을 파는 일만하고, 또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모든 책임을 임금에게 씌우는 음모를 꾸미는 일만 계속합니다. 조 선의 현 정세 아래서는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하고 이런 한심한 부조리를 바로잡을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백성은 각종 세금과 수탈과 착취에 짓밟혀 극도의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조정 관원들이나 포졸들이나 양반들이나 모두 하나 같이 가렴주구에 눈이 먼 약탈자들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1년 내내 고달프게 일하지만 조정 관리들의 탐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이런 처참한 사정을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드릴 말씀이 많지만 이쯤 끝내겠습니다. 이제 다른 비참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구제책을 강구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생략하고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위생적인 물을 개량할 처방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박학하므로 그런 처방 한 가지를 우리에게 일러줄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이 나라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에 상당히 좋은 곳이 평야에나 산골에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민들은 실성하거나 간질에 걸리고, 피 섞인 가래침이 나오며, 몸이 나른해지는 등등 여러 가지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이 청을 신부님께서 들어주신다면 우리 불쌍한 신자들에게 가장 큰 위안을 마련해 주시는 셈이 됩니다. 신자들은 성물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불같습니다. 상본이나 고상이나 성패를 장만하기 위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 성물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생존에 꼭 필요한 전 재산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선뜻 다 내놓습니다.

성물을 사기 위하여 신자들로부터 돈을 모으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그 돈을 보내드리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돈이 은화라면 쉽게 보내 드릴 수 있겠지만, 조선에서는 은화라는 것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일 신부님께서 성물을 살 만한 여분의 돈이 있으시면, 신부님께서 얼마간의 크고 작은 십자고상과 성패와 상본 등을 사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상본은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세자 성 요한, 사도들, 성학자들, 그 밖의 성인 호칭 기도에 나오는 성인 성녀들의 상본들이면 됩니다.

그 물건들은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것이라야 합니다. 그 대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금액을 알려 주시면 나중에 기회가 닿는 대로 그 값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블뤼 신부님은 아직 아무 일도 못하고 계십니다. 주교님과 저만이 공소를 순회하면서 신자들을 찾아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꽤 편안히 지내고 있는 셈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전반적 박해는 없으나 부분적 박해는 결코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저 박해자들이 마침내 교회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양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주 하느님을 기쁜 마음으로 적극적이며 자유롭게 섬기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제 이 서한을 끝마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사랑하고 공경하는 모든 신부님들께 거듭거듭 감사와 인사를 드립니다. 불쌍한 우리 모든 조선 사람들을 자주자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종,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출처 : 정진석 역, 『너는 주추놓고 나는 세우고』1995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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