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12, 2009

이경언 바오로 옥중서간

어머니, 누님, 형님, 형수님 그리고 아내에게 드립니다. 집을 떠난 후 붙잡힐 때까지 13년 동안에 두 번 밖에는 가서 문안을 드리지 못했읍니다. 이것은 저로서 큰 불효입니다. 36년 동안 저는 크고 작은 허물 없이 지낸 날이 없었으며 효도의 본분을 어기기만 했는데, 오늘 뜻밖에도 천주께서 비상한 특은으로 죄악이 가득한 이 사람을 영생의 복락에로 부르십니다. 이것이 부끄럽고 가슴 떨리는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그 분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 아니할 수가 있겠읍니까.
놓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읍니다. 그러나 겁이나는 것은 제 구원의 일로 보아 30여년이나 되는 세월을 허송한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별로 무섭지않습니다. 지금도 저는 열심하지 않고 통회도 없고 완전한 애덕도 없읍니다. 그러나 오직 천주와 성모 마리아의 끝 없는 인자하심만을 믿고 있으니 저를 저버리실 수가 있겠읍니까. 천주께 그 분의 모든 은혜를 감사하여 주십시오.
누님,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 같은 동생에게서 누님은 사실 아무런 우애의 표시도 얻어보지 못하셨지요. 이제는 누님과도 영 이별이군요. 이 세상에서는 다시 뵙지 못하게 되겠읍니다. 그러니까 덕을 닦고 공을 많이 세워서 천주 대전에서 영원히 같이 즐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제 어머니께 대한 아들의 본분이나 누님께 대한 동생의 본분을 채울 길이 없겠으니, 우리 마음과 기도와 노력을 합하는 것만으로라도 영원한 복락 가운데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님께는 무슨 말을 할까요. 형님 같이 착하고 덕이 많은 분이 쓸모 없는 동생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읍니까. 형님은 무엇보다도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조약돌에서 튀기는 불꽂 같이 빨리 지나가는 이 세월을 긴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의 노후를 정성껏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 자매 등 온 집안이 영원한 나라에서 한데 모여 우리의 공번된 아버지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읍니까. 저와 같이 큰 죄인이요 악인에게도 천주께서 이렇듯 큰 특은을 내려 주시니 본성이 착하고 바른 형님께서야 조금만 힘을 쓰신다 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근실히 닦아 선종의 은총을 받으실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저는 형님께 걱정만 끼쳐 드렸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제 아내와 두 자식은 아무 의지할 데가 없게 되니 형님 말고 그 누구에게 그들을 부탁할 수 있겠읍니까. 지금도 짐이 무거우신 형님이 어찌 이 일을 감당하실 수 있겠읍니까. 참으로 딱해서 가슴이 스뭇 메어집니다.
형수님 안녕하십니까. 저를 길러 주시고 품에 늘 안아 주시고 지금까지 그렇게도 제 걱정을 해주시고 제 처지를 안타까와하시던 형수님이 이 편지를 읽으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읍니까. 그러나 천주께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그 한량 없으신 인내로 천주께서는 이 불쌍한 동생에게 십자가의 길로 예수를 먼 발치로라도 따라 갈 수 있는 은총을 주시려 하십니다. 순교하신 형님과 누님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행복을 얻어 주셨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천주께 감사를 드려 주십시오. 한가지 청을 드릴 것이 있는데 저의 이 마지막 청을 물리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아들은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아이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 아이를 아주 양자로 삼아 가르치셔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 주십시오. 제 일생이 제게는 후회의 근원입니다. 형수님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한 적이 너무나 많았고, 말씀을 너무나 안듣고 그 밖에도 말씀 드리지 못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5남매 중 셋이 순교자입니다. 천주님으로부터 이 보다 더 큰 은총을 바랄 수 있겠읍니까. 다른 성인들과 형님과 누님에게는 이런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와같은 사람에게는 이 얼마나 큰 특은입니까!
그리고 아내여, 나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주시오. 나와 같은 나쁜 남편은 다시 없으면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은 이루 글로 다 쓰지 못할 거요. 13년을 같이 사는 동안 나는 한시도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당신에게 근심 걱정만 끼졌을 뿐이오. 이제 갑자기 죽음을 마주 대하게 되니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리까. 이제 다시는 이 세상에서 같이 살지 못하게 되었소. 그러니 과거에 대한 약은 있을 수 없고 남느니 오직 회한 뿐이오. 비록 내가 남편의 본분을 잘 채우지는 못했어도 천국에 올라가는 은혜를 얻게 되면 당신에게 착히 살고 착히 죽는 은혜를 얻어 주기 위하여 전구하겠고, 또 나 자신이 천주께서 당신에게 내려주시기로 된 행복을 전하는 사자가 되어 당신에게 마주 와서 손을 이끌어 영복을 누리는 곳으로 인도하겠소.
간결히 부탁하니 모든 일에 천주 성은을 따르고 지난 모든 일을 뉘우치고 이 세상을 일장춘몽으로 알고 영원한 나라를 당신의 참 본향으로 여기시오. 아아, 나는 어떻게 이렇듯이 세상을 그리 중하게 여길 수가 았었던고. 며칠 후면 모든 것이 결말이 날 것 같소.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마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모든 천주의 성은에 달렸고, 사람들이 계획하는 바는 허사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뉘우침 조차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짓이오.
어머님은 아직 이 세상에 계십니다마는 얼마나 더 사실는지요. 이 세상에 낳아 주신 어머님의 자식들이 하나씩 둘씩 순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진실한 통회를 발하도록 힘쓰시고 선종하는 은총을 받도록 하십시오. 형님과 누님이 최후에 남기신 말씀은 정성과 효성이 가득찬 것이었읍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여쭙더라도 그것을 익히 생각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형수님도 잊지 않겠읍니다. 잊지 않고 말고요. 제가 형제 자매 중에 누구에게 무관심할 수 있겠읐니까. 하지만 형수님이 저를 위해 당하신 수고와 들어 주신 시중은 어머님의 수고와 시중 다음으로 으뜸 가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저도 어머님 다음으로는 형수님을 탁 믿고 의지하였었읍니다. 몇 해 전에 연풍에 갔을 적에는 형수님을 뵙지 못하고 돌아왔읍니다. 그것이 만 번 후회가 됩니다마는 이제 와서 어찌 하겠읍니까. 그러니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만나 뵙니다.
내 아들 딸아, 내가 주의 은혜로 너희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마는 내 죄가 중하기 때문에 본분을 타당히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또 너희들이 철도 들기 전에 내 생명의 줄이 끊어지게 되는구나. 너희들에게 물려줄 덕도 없고 재산도 없으니 다만 몇 마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자 한다. 천주의 성은을 충실히 따르고 어머니께 대해서 효도의 본분을 지키도록 하여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공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라. 그래서 이 세상에서 착한 길을 따르면 분명히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나는 불쌍한 죄인이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마는 그래도 나는 아버지니 아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내 본분이다. 또 옛 어른들의 이 지혜로운 격언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주기를 부탁한다. 즉 비록 가벼운 잘못이라도 절대로 저지르지 말며, 또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선이라도 항상 힘써 행하라는 것이다. 다른 분들에 대하여도 쓸 말이 많으나 종이와 붓이 모자랄 뿐 아니라 또 다시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아랫도리를 쓸 수가 없고, 20근도 더 되는 큰 칼을 쓰고 있어 정신이 얼떨떨하고 팔이 떨린다. 그래서 더 글 쓰기를 계속하지 못하겠다. 무엇보다도 특히 착하게 살고 착하게 죽기를 힘쓰기 바란다. 천만 번 부탁이다.
죄인 이경언 바오로

No comments:

Post a Comment